법무사

아~ 하늘이시여!(법무사시험 합격수기-펌)

pks0413 2007. 2. 15. 16:21

아...! 하늘이시여


Ⅰ.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천사의 모습으로 꿈나라에 가있는 이수와 이백이를 내려다 보면서 진정코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힘든 삶에 지쳐 아직도 펴지지 않은 아내의 얼굴에 가만히 손을 대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아니 그저 길기만 했던 고통의 시간을 이제 차분히 되돌아볼 기회를 주신 한국고시와 수림출판사에 감사의 말씀 드리며 그동안 제게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마음 전하기 위해 어느때인가부터 감추려고만 한 저의 부끄럽고 초라한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 놓으려고 합니다.

Ⅱ. 교만... 그 결과는...

1. 행운의 사법시험 1차 합격

저는 1982년도에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86년도 2월에 졸업하였습니다. 어릴적 꿈은 별을 보는 것이 좋아 천문학자, 책을 마음껏 읽고 싶어 서점주인, 평화로워보이는 목장주인, 고등학교때는 공군 비행조종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때부터 판사가 되라는 어머님의 권유에 막연히 법학과에 갔고 졸업을 하면서 법학과 출신의 관행처럼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1989년 3월 5일 병역을 마치고(단기병) 5월 6일 약 2개월 신림동 고시원에서 준비하고 본 사법시험 1차가 4개 차이로 합격이라는 행운으로 다가오면서 저의 한스럽고 고통스러운 고시 인생이 시작됩니다.

행운의 결과를 놓고 저는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돌고 있고 세상의 주인공은 저이며, 저라는 인간이 하늘에서 선택받은 존재가 아닌가라는 실로 심각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교만이 극을 달하여 대충해도 2차는 될 것 같고 노는데 열중하다 보니 그당시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을 2년정도 지나서야 친구를 통해 알았습니다.

2. 천벌은 시작되고

다음해 3월부터 정신을 차리고 늦은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하면 되겠거니 믿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며칠 못가 드디어 천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감은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2차에 되면 뭐하나? 합격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시기에 안맞는 해괴한 의문이 마음에 꽉차게 되고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일단 시험이나 보고나서 고민하자 마음을 다잡으려해도 몸과 마음에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 무기력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떠한 성취욕구도 일말의 승부욕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험을 승부라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1차에 한해서만큼은 승부욕을 느낄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때 느낀 무기력감은 이후 2005년 시험때까지 저를 옭매는, 제가 헤쳐 나올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장애가 되었습니다. 교만의 결과는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도 다가와 시험 공부기간이 길수록 시험과목이 매년 늘어난다는 사실도 저는 이때부터 알게 됩니다.

Ⅲ. 몸부림치는 세월이여

1. 미련이 남아

제대로 준비도 못해보고 불합격을 하는 바람에 미련이 남아 한번 제대로 해보고 떨어지면 미련없이 떠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고시반인 법현대관에 자리를 잡고 시작을 하려는데 이미 경제적인 여건은 더 이상 이를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관장 직책을 맡아 장학금을 받고 고시반에서 잠도 자면서 다음해를 준비했지만 1차 결과는 현격한 점수 차이로 불합격... 정신이 분산된 결과라고 생각되었습니다.

2. 취직 그리고 카드에 당하다.

91년말에 저는 대한교육보험 법무팀에 입사를 하였는데 틈틈이 준비를 하여 92년 사시 1차를 보고난 후에 퇴직을 하였습니다. 시험을 잘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해 보다 무려 18개가 올라간 50개 커트라인에 2개 부족하여 불합격. 이때부터 엄청난 시련이 제 앞에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직장에서 만들었던 카드 3개로, 저의 사정을 가장 잘알고 그래서 믿었던 친구가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반이상 그 친구가 갚았지만 나머지는 대책이 없어 나몰라라 하는 심정으로 98년 말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친구는 그래도 저밖에 볼 친구가 없다고 그당시 2일에 한번꼴로 찾아와서는 품속에서 부엌칼을 꺼내 보여주며 은행을 털거라고 하는 표정에서는 저는 어떤 기대도 못하게 되고, 세상을 산다는게 뭔지... 몸과 정신은 공중에 그냥 떠다니는 느낌이었습니다.

3. 나락의 끝인줄 알았는데

95년 1차를 대비해서는 정말 처음으로 기본서 위주로 하루 10시간 이상씩 독서량 100p이상씩 보기로 친구 전00와 계획을 세우고 1년간 준비해 자신있게 달려 들었으나 결과는 1차 불합격. 처음으로 ‘해도 안되는가’라는 능력에 대한 회의와 어떤 벽을 느꼈습니다. 다행히 변호사이신 선배의 도움으로 다시 96년 1차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96년 1차 시험은 또한 후배 0진의 하숙방에서 얹혀살며 도움을 받아 무사히 시험을 치루게 되었고, 발표가 가까이 와서는 도움받은 분들께 떨어지면 사기꾼이 된다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다행히 오랜만에 1차 합격을 하였습니다.

4. 결혼... 제2의 인생은.

6월에는 연세대학교 점거농성이라는 사회적인 큰 사건이 있었고 7월에는 법현대관장에 다시 선출되었습니다. 11월에는 지금은 베리타스 학원에서 헌법 강의를 하는 후배 박00의 소개로 만난 사랑하는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는 행운을 얻어 다시 장밋빛 인생을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5. 98년의 악몽(12.12)

생활의 안정은 잡혔으나 97년 2차 시험도 고질적인 무기력감에 빠져 맥없이 떨어졌습니다. 2차 불합격 뒤 아내에 대한 미안함, 책임감, 그리고 승부욕이 불타올라 98년 동차를 노리고 신림동에 독서실을 잡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새벽 6시 전에 나와 밤 11시 30분쯤 집(신림4동)에 가는, 몸이 힘들어 콧바람이 시큰거리게 나도 그런 상태를 ‘아 나도 열심히 하는구나’라는 짜릿한 재미를 느끼며 생활을 하였고 98년 1차 시험을 무사히 보았는데, 발표가 가까울수록 불안해지는 마음이 오히려 이상하였습니다. 주관적인 예상 커트라인 56개, 제 점수 53개로 합격이라는 예상이었는데... 결과는 불합격. 그저 멍할 수 밖에 없었고 믿기지 않았습니다. 점수를 확인한 결과 독일어, 지적재산권법이 12점씩 나왔습니다. 행정심판을 제기하였다가 후에 취하 조건으로 송0헌 사무관이 제 답안지를 보여주었는데 뻔치뚫린 정답지를 이리저리 맞춰 보더니 과목 자체를 잘못 표기했다는 것입니다. 그순간에는 우선 제 실수라니까 너무 창피하고 해서 그 자리를 빠져 나오려고 서둘러 일어서는데 송사무관이 저에게 “선배님! 법무사 시험 한번 보시는게 좋겠습니다”라고 권유했습니다. 학교후배라면서 그렇게 말한건데 고마운 맘이 들어 98, 99, 2000년도 매번 법무사 시험 접수를 하였으나 정작 시험장에는 불참했습니다. 왜냐하면 98년 시험때 추가 합격자가 그후 몇해에 걸쳐 나오는데 저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아직까지도 98년 마킹 당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하늘의 장난이라는 억울함으로 세월을 허비하였습니다. 이때 제 기가 꺾였다고 봅니다.

5. 제가 불효자입니다.

2000년 사시 1차 발표 1주일후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거짓말 같이 쉽게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님 앞에서는 저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끝내 장남인 제가 합격하는 모습을 못보시고 한때는 자랑거리에서 근심덩어리로 전락한 저를 질책 한번 안하시고 세상의 미련을 버리신 것입니다. 보훈청의 안내에 따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 신청을 하고 납골당에 모시고 돌아오던 날 안장불가라는 연락을 전화로 받고는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이후 본인 소송으로 대법원에까지 상고를 했지만 기각되고 올해 4월에서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셨습니다.

Ⅳ. 잡초

99년 2월에 첫째 딸 이수를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저희를 사랑해 주시는 장인어른, 장모님께서 딸아이를 키워주시러 강원도 시골생활을 정리하시고 올라오셨고 이후 지금까지 둘째 이백이까지도 키워주고 계십니다. 2000년 9월부터는 학원의 진도별 모의고사와 전범위 모의고사를 따라가며 준비한 끝에 2001년 사시 1차에서는 10개 차이로 무난히 붙었습니다. 그러나 또 고질적인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2001년 11월부터는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 매일 신림4동에서 신림9동 독서실로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2002년 2차시험 역시 몸은 발버둥을 쳤으나 의욕이 없는 마음상태로 치뤘으며 결과는 역시 불합격.

2003년 사시 1차를 보고나서 불안한 마음에 대안으로 진지하게 법무사를 보기로 했습니다. 3월 19일부터 Tape를 사서 듣는 스터디를 약 1달간 하고 나머지는 혼자서 문제집 위주로 하다 6월에는 서울 법학원의 최종 정리반을 들었습니다. 1차는 5개 차이로 합격. 그런데 교만이 고개를 들고 법무사 시험을 만만히 보게되어 설렁설렁 준비한 2차 시험은 너무 어이없는 점수로 불합격하였습니다. 비로소 사법시험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저를 엄습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4년 법무사 2차시험 준비는 2월 26일부터 시작하였는데 법무사 시험에 대한 두려움과 또 고질적인 무기력증으로 우왕좌왕 마음을 못잡으며 2차시험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결국 또 불합격. 2차시험이 무서워졌습니다.

지겹고 지겨운 고시인생. 하늘을 원망하며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발표후 며칠간 삼성산을 아침마다 올랐습니다.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며 충동도 일었지만 아플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이런 자신에게 웃음도 났습니다.

2005년 어영부영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죄인이라는 생각에 아침일찍 나와서 저녁 5시쯤 걸어서 집으로 가는 생활을 약 3개월간 했습니다. 4월부터는 밤에까지 시험준비를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끝에 7개 차이로 1차를 붙었으나 의욕은 어느새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불합격.

Ⅴ. 실타래가 풀리려는지

답답한 수험생활이 끝나가려는지 저에게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대학 2년때부터 친하게 지내며 저와 많은 삶을 공유한 친구 경일이가 11회 시험에 붙은 것입니다. 대학시절부터 사시합격 0순위로 꼽혔던 친구였는데, 운에 항상 배척당하다 결국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고 저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점입니다. 둘째로는 2005년 11월 말부터 수림 출판사에서 법무사 1차 책 개정작업에 참가하였는데 여기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인연이 닿았는지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2006년 2월 9일 스터디를 결성하게 되는데 ,스터디를 해본적이 없고 스터디에 대해 막연히 동경과 함께 불신을 갖고 있던 저로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선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어가는 것을 좋은 징조로 느꼈습니다. 사시와 법무사 1차 경험이 많은 5명이 시작과 끝을 함께 하였는데 다른 어떤 팀 보다도 낫다는 자부심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저희 5명은 서로 격려하며 만나면 그저 즐거운 기분이 드는, 그래서 매일 만나고 싶은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저에게 복이 찾아 왔다고 생각됩니다.
토요일의 경우에는 삼막사 입구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경인교대 교정을 산책하면서 여유를 찾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즐거운 스터디 기간이었고 2차 시험 전날까지도 매일 보면서 용기를 다지곤 했습니다. 세 번째 변화는 공부 시작전에 1월부터 9월까지 경제적인 도움을 친구등에게서 약속받았다는 점입니다. 아내의 지원으로는 부족했던 부분이 손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네 번째는 만 6년을 끌어온 아버지의 대전 현충원 안장 신청이 4월들어 승인되어 결국 4월 25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셨습니다. 김복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저에게 시험에 대한 자신감을 주게 되었고 어느정도 의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Ⅵ. 간절함을 하늘이 아셨는지.

2차 시험장을 나설때 합격에 대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막연하지 않은 구체적인 느낌이 왔습니다. 그러나 발표가 가까워지면서 불안함에 매몰되어 자신감과 합격의 기대는 찾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시험장 나설때의 그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매일 매일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하늘에 빌었습니다. 떨어졌을때의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오직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Ⅶ. 후기

1. 아...! 하늘이시여

12월 13일 저녁 6시 정각과 함께 전화기가 불이 났습니다. 통화중에도 계속 신호음이 들어오고, 한 후배 왈 “형, 10년 전부터 이 전화를 하려고 기다렸던 사람들이에요” 저에 대해 이렇게 관심있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비로소 제가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하늘이시여! 진정코 감사하나이다...

저의 스터디팀은 5명중 막내가 총대를 매고 4명이 합격했습니다. 막내에게 안타까운 마음 전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난 제게 복이 있었다고 봅니다. 채점 기준에 대해(어디까지나 제생각입니다만) 제 주관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어떻게든 쓰기만 하면 점수는 나오고, 그러나 고민하며 쓴 답안은 예상문제라고 해서 쉽게쉽게 쓴 답안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법무사 시험에 뛰어든 분들은 양 시험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며, 특성을 느끼지 못하면 시험에 합격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성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사법시험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법무사 시험만 준비하셨던 분들은 시험 추세의 변화에 적응하시려면 최소한 기본서로 한번은 진지하게 공부하실 것을 권합니다. 스터디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자면, 나이들어 여러 가지 이유로 젊은 층에 비해 공부시간이 적어지게 되는데,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우선 가치로 두고 즐겁게 하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스터디의 장점은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흔들리는 마음을 서로 잡아줄 수 있다는데 더욱 그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공동 운명체를 느끼니까요...

내년의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가 시험되는 것을 보니 나도 내년에는 되겠다.” 맞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됩니다. 시험에 부적합한 자로 저는 ① 독하지 못한자, ② 머리가 어중간하게 좋은 자 ③ 성취욕이 없는자를 꼽습니다. 저는 이 3가지를 고루 겸비하여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시험기간을 통해 배운 것은 「겸손」과 「세상은 결국 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2. 고마우신 분들

공부기간이 길다보니 도움을 주신분이 너무 많습니다(그동안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한 저였습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인사를 못드리며 모든분께 그저 감사드립니다)

내년을 위해 이를 악문 문기, 문영, 영만이. 내년 필 합격을 믿는다. 열심히 성실한 자세를 보이며 사시 준비를 하는 박철0씨. 또한 형님. 제가 좋아하는 두분 내년을 믿습니다.

합격소식에 눈물을 쏟으신 장인어른, 장모님, 처가 식구들. 기쁨보다 죄송함을 먼저 느끼고 있습니다.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못난 자식을 두신 죄로 친구분들도 안만나시고 걱정으로만 사신 어머니, 누나들. 이제 힘내세요. 저 장남. 큰아들입니다. 결혼 10년동안 직장을 다니며 저를 뒷바라지 해주고 아이들 둘을 키우면서도 믿음과 사랑을 끊임없이 보내주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영광 모두를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자료출처 : 수험포탈-한국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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